청소년기는 부모에 의존하던 아동기에서 독립적인 성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인 발달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다른 인생 주기에 비해 두드러지게 불균형과 혼란을 경험하는 시기이다. 아동기에서 벗어나 성숙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발달과업의 하나인 자아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한데(Erikson, 1982), 청소년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 자기평가와 타인평가의 불일치, 사회적 가치와 주관적 가치의 불일치 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며 이러한 정체성 위기 과정을 통하여 자아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청소년기에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사회적인 환경에 주체적으로 적응함으로 다양한 삶의 도전들을 해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실패하면 적절한 심리적 사회적 발달을 이루지 못하고 가정, 학교, 사회의 관계에서 다양한 정신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Jung은 청소년기의 신경증은 중년기와 달리 삶을 두려워하거나 삶에서 물러서려 할 때 생긴다고 하였다(이부영, 2002). 청소년기의 신경증으로 청소년이 자아개념의 확립에 실패하면, 의욕상실, 주의집중력 감소, 우울 등의 심리 증상과 식욕감소, 체중변화 등의 부정적 건강상태를 경험하게 한다(이현지, 김명희, 2007에서 재인용). 청소년 시기 자아정체감의 혼돈을 경험하는 청소년은 스트레스나 갈등상황에 직면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인식하는 경우 죽음을 선택할 위험이 있다(이현지, 김명희, 2007에서 재인용)는 보고가 있다. 이는 청소년시기 건강한 자아정체감 형성이 중요함을 알 수 있게 한다.
모래놀이치료는 Dora Kalff가 M. Lowenfeld의 World Technique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융 심리학적 치료방법이다. Kalff가 말하는 “자유로우면서도 잘 보호받는 공간”인 모래놀이 공간에서 내담자는 그들의 내부에 있는 판타지를 안전한 모래상자에 표현하게 되는데(가와이 하야오, 2006), 내담자는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심희옥(2014)은 모래놀이에서 놀이는 미리 의도하지 않는 것으로 이러한 놀이의 무의도성이 긴장, 불안과 경직된 사고방식을 사라지게 한다는 Kalff의 말을 인용하며 내담자가 내적인 힘과 용기를 발견하게 해주어 스스로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내적인 질서를 갖게 해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래놀이 경험은 내적인 세계와 외적인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주고, 일상에 균형감을 제공해 주며 더 나아가서는 삶을 통합하도록 이끌어준다 (Friedman & Mitchell, 2008).
모래놀이치료는 상징놀이라는 위협적이지 않은 놀이방식이다. 이러한 모래놀이의 특징은 내담자가 놀이를 통해 문제를 재경험하며 현실의 삶에서 처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준다(Goss & Campbel, 2004).
또한 이러한 상징놀이는 내담자에게 자신의 문제를 은유적, 상징적 이야기라는 안전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비언어적인 모래놀이치료는 자신이 왜 이런 기분인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의식이 미숙하고 정서와 행동에 어려움이 있는 청소년들이 자신에 대해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오경임, 김도연, 2017에서 재인용). 또한 ‘자유롭고 보호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래놀이치료는 ’창조적인 퇴행(creative regression)’을 촉진하며(Weinrib, 2004), 퇴행을 통하여 ‘자기치유력’이 회복되어 왜곡되었던 초기 아동의 상황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Ammann, 2009).
본 연구는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청소년기의 모래놀이치료 사례연구이다. 내담자가 모래놀이치료를 통하여 자존감과 자아정체감을 강화해 나가는 측면을 살피고자 한다. 또한 내담자가 배척하던 사회적인 가치관을 통합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족 및 교우관계를 회복하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진로의 선택)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방 법
본 사례는 우울과 불안 자살충동 등을 호소하는 고등학교 3학년(만17세) 여학생의 사례이다. 학년 초부터 우울 정도가 심해지고, 때때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불안해하는 증상을 모와 학교의 상담교사에게 호소해 왔다. 모는 내담자가 힘들어하는 감정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였으며, 엄살을 부린다고 무시하였다. 학교에서는 성실하고 모범적이며 발랄한 모습을 보여 상담교사가 내담자에 대한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가정 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자살사고 및 충동의 문제를 보여 부모의 동의 하에 학교 상담교사를 통하여 상담 의뢰되었다.†
첫 방문 당시 내담자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 차림이었으며, 허리까지 기른 검은 생머리를 풀고 내방하였다. 위생상태는 좋아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수수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복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귀걸이를 착용하여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크고 또렷하며 예의 바르고 애교 있는 억양이었지만 말하는 도중 표정이 차갑게 굳고 어두워져 의식적으로 호감형으로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의뢰 당시 내담자는 본인의 감정 상태가 어떠한지 파악하길 어려워하고, 엄마 목소리 같은 환청이 반복해서 들린다며 혼란스럽고 불안해하였다. 외부의 반복적인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집에서는 항상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지낸다고 하였다. 내담자의 방 창문이 높은 위치에 있는데 밤마다 문을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면 죽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고 호소하였다.
학교에서는 교우관계에 큰 문제가 없고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친한 친구 무리가 있지만 진정한 친구라고 여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였으며, 대학 진학을 앞두고 혼자서만 다른 입시 전형을 선택한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담자는 ‘속된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다’며 문예창작과 진학을 원했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안정적인 직업을 바라는 부와 진학 문제로 갈등 빚고 있었다. 진로 선택에 대해 겉으로는 본인의 주장이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선택에 대한 불안함과 의지하고 싶은 욕구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모는 내담자의 진로에 대해 무관심하여 ‘알아서 잘 하라’며 아무런 조언이나 도움을 주지 않아 부와의 갈등과 모의 무관심 속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의 부재로 고통스러워하였다. 모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반복경험은 내담자가 논리적이고 사고적인 측면을 발달시키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내담자는 친구의 고민을 듣게 되면 자신의 모가 했던 것처럼 친구에게 ‘공감’보다는 비판적인 조언을 해주는 등 원만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지 못하는 측면을 보였다.
모와 내담자의 보고에 의하면 내담자는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모가 내담자를 임신하였을 때 심적으로 우울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모는 계획된 임신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담자는 모가 ‘어린 나이에 너(내담자)을 임신하여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한다.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출생하면서 자주 병치레를 하여 내담자는 주로 이모가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담자는 정서적으로 의지하던 이모가 내담자를 양육하는 문제로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책을 하였다고 한다. 내담자는 동생을 편애한다고 생각하여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에게 서운함이 많았다. 또한 자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6세부터 다니던 유치원에서 선생님께 야단맞은 기억이 주로 나며, 옷에 소변 실수를 한 이후에 선생님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고 믿고 있었다. 내담자는 유치원 선생님들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내담자는 실수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받은 경험이 부족하다고 한다. 초등시절 순하고 착한 편이었고 피아노와 그림에 소질이 많았지만, 그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모가 “그 친구는 애가 별로인 것 같으니 사귀지 말아라”와 같이 친한 친구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주로 하여 내담자는 또래관계를 원활하게 맺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반면 “그냥 그런 친구들을 사귀느니 배울 것이 많은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해라”며 선생님과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모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부는 대졸의 기계설비와 관련된 회사원으로, 조모에 대한 각별한 애정, 금전 지원 문제 등으로 모와 갈등이 심한 상태라고 한다. 부는 항상 바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며, 상담 당시 장기 해외 출장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모로부터 부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 부를 미워하고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모는 전업주부로 내담자에게 때로는 친구 같은 엄마지만, 철이 없고 무심하여 내담자가 힘들어하면 외면하는 모습이 잦았으며, 감정을 공감해 주지 못하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모는 자신이 힘든 일이 있으면 내담자에게 의지하거나 떠맡기며 장녀의 역할을 강요하였다고 한다. 내담자는 부정적인 감정의 반복 표현과 ‘공감’해 주지 못하는 모에게 언제나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감정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결 과
“노을이 지는 적막한 저녁. 파도 소리만 들린다. 나는 초조감이 있는데, 모래시계는 쫓기는 느낌 때문에 놓았다. 배가 모래 위에 있어 더 시간이 촉박한 것 같다. 고래는 자유롭고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양옆의 작은 돌고래들은 고래를 오히려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문은 미처 못 닫고 나간 상태라 열려 있다”.
내담자는 소품을 고르면서 해보고 싶었던 상담이라고 즐거워한다. 소품들을 한꺼번에 들고 와 상자 옆에 내려놓고 긴 시간 동안 양손의 손가락으로 상자 전체의 모래를 살살 저어주듯이 만져본 후 손가락을 이용하여 천천히 작은 바다를 판다.
“안개가 낀 곳이다. 시간대를 알 수는 없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돌아가기는 어렵고 앞은 막혀 있는 상황이다. 기관사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다. 책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해결책이라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우체통에 질문을 넣으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다른 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담자는 소품을 몹시 신중하게 고르고 숙고하며 상자에 표현한다.
실제로 나무를 심듯이 모래를 파고 나무를 놓은 뒤 모래를 손끝으로 토닥거린다. “정원이다. 갈색 풀들이 들러리 같지만 주인공인 느낌이 드는 풍경이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차분하고 초라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이 정원에 와서 깨닫게 되면 좋겠다. 이 정원에서는 중요한 우물이라 중심에 있다. 악의가 없는 사람은 드나들 수 있도록 조금 열어 두었다. 이곳의 다음 주인은 나다. 우물의 물은 절반 정도인데 내가 정원을 맡지 않으면 수위는 더 낮아질 수 있다”.
학교에서 항상 밝고 모범적인 모습만 드러내던 내담자는 “나의 어두운 면을 목격하고 그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이 싫다. 나는 왜 항상 밝아야만 하나? 누구에게나 어둡고 우울한 면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주었으면 좋겠다”라며 자신이 스스로 내면에 그림자 같은 측면이 있음을 고백하는 듯하다.
첫 번째 소품인 책꽂이의 위치를 고심하여 선택한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여 나만의 작업실을 가지고 그 일을 꼭 하고 싶다. 카트 안에 담긴 호루라기, 저울, 모래시계 등은 모두 가져다 버릴 것이다. 고양이는 또 다른 나 같다. 무서워 보이지만 허술하고 멍청하기도 하다. 알아갈수록 더 끌리는 동물이 고양이인 것 같다”.
내담자는 이날 붉은색의 무언가를 피해서 도망 다니는 악몽을 꾸었다며 ‘꿈’ 이야기를 한다.
5회기에선 두 손을 모래에 담고 과감하게 휘저은 뒤 손바닥으로 모래 위를 전체적으로 토닥인다.
꽃나무 선택에 공을 들이고 한 그루씩 정성 들여 상자에 심는다.
“데미안이 생각난다. 언덕 위에는 호랑이가 지키고 있는 꽃이 있다. 이 꽃은 금기로 여겨지는 것인데 건드리고 나면 오히려 자유롭다. 호랑이는 누군가 꽃을 건드린다 해도 해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두렵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흥미롭게 읽었다는 ‘책’의 내용을 상담자와 공유하려 하는 느낌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보는 느낌이다. 회전목마는 동심을 보여준다. 오랜 시간 아무도 타지 않아서 풀이 자라났다. 쓸쓸하다”라며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다.
내담자가 느꼈던 감정에 무관심한 모의 모습들. 술 먹고 돈 문제로 싸우는 부모님이 무서워 긴장감을 자주 느꼈던 일 등 주로 암울하고 불만스러운 기억을 쏟아 놓듯 이야기한다. 반면, 자전거를 보며 자전거 타기나 가족 캠핑 등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도 있다며 눈물을 보인다.
평소보다 우울한 모습으로 내방하였다. 마른 모래 위에 물을 살살 뿌려준 후 왼손만 이용하여 모래를 휘저으며 섞어준다.
“내가 살고 있는 방이다. 사다리는 꿈나라이다. 이 공간만 벗어나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이 방은 방치되어 있고,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가 들어놨던 흔적이 있다. 방 안은 무척 어둡다. 엄마는 내게 관심이 없다. 내 이름을 필요할 때만 부른다. 아빠와는 진지한 이야기를 전화통화로는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외롭다”라며 눈물을 보인다.
“왼쪽은 나다. 나는 이상적이고 내면적인 행복을 찾는다. 돈은 없지만 꿈을 꾸며 쉬어 갈 수도 있다. 전화기는 깊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을 의미한다. 반대로 오른쪽은 꿈꾸기보다는 무조건 달리고 보는 사람들이다. 결국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이다. 서로 경계를 하느라 넘어가지 못한다. 나는 지금까지 현실과 이상 사이의 중심을 잡으며 지혜롭게 사는 어른은 보지 못 하였다”며 단호하게 표현한다.
방학이라 잠을 잘 잔다. 편안하다며 신중하게 9회기까지 사용했던 소품을 놓고 중앙의 아이를 놓는다.
“내 또래의 사람을 놓고 싶었는데 맘에 드는 것이 없어서 순수한 아이를 놓았다. 과거에 의자에 앉아 있었던 내 자신이 지금은 중앙에 와있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엄마상은 아니지만, 엄마에 대해 조금은 유연성이 생기는 것 같다”라며 소품 하나 하나에 대해 설명을 한다.
한 달 만에 내방하였다. 모와 크게 싸웠는데, 모의 말들에 상처받지 않고 함께 대들며 싸웠으며, 싸운 후에 오히려 엄마와의 관계가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상자를 꾸민다.
“심판대 같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데, 죽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살아서 오는 사람도 있다. 만약 내가 심판대에 선다면,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니까 심판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심판의 주체는 어쩌면 ‘나’일 것 같다. 상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니 심판대가 아니라 격한 감정을 가라앉혀 주는 무릉도원같이 편안하고 좋다”고 한다.
“진로를 ‘문예창작과’에서 연예 관련 경영학과로 변경하기로 했다. 현실적이고 조금 더 구체적인 학과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취업률이 높은 쪽으로 진로를 바꾸기를 잘 한 것 같다”.
“차분해지는 계절인 가을의 정겨운 풍경이다. 내가 혼자 사는 집인데, 완전 고립되지는 않은 산에 위치하였고, 친구들을 초대하여 티타임을 즐긴다. 채소도 키우고 동물들도 자유롭게 풀어놓아 기른다. 사람 소품을 놓으면 구체화 되는 것이 싫고 상자를 망쳐버리는 느낌이 든다”.
내심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대했던 치료자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연예 관련 대학의 ‘엔터테인먼트 경영학’과 면접을 보고 와서 무척 설레고 들뜬 모습이다.
“TV 불빛만 보인다. 우리 가족이 이 공간에 모두 앉아 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하다. 가정 내에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거부당하는 기분이 들어 화가 났는데 지금은 각자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고 분노하는 마음도 줄어들었다. 무조건 참고 양보하는 마음이 아니라,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으며, 항상 암벽 등반을 하는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편안해졌다”고 한다.
사례연구의 내담자는 우울 불안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부모와 또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심한 소외감도 호소하였다. 내담자에게 18회기의 모래놀이 치료는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아정체감 확립을 통해 내적인 갈등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1회기에서는 바다에 지켜주는 고래가 있어 무의식의 바다에서 무언가를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왼쪽의 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있다.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연상시킨다. 내담자가 ‘나의 우주’라고 표현한 자신만의 세계를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탐색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2회기 상자에서는 보편적인 가르침이 있는 서적을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자신만의 답을 찾고자 한다. 내담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해주는 지혜로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줄 존재를 찾고 있다는 느낌을 우체통과 가로등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폭포 아래 돌이 쌓여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고, 기차도 원활하게 통행하지 못하며, 뾰족한 솔잎과 새장에 갇힌 새 역시 자유롭지 못하고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돌덩이로 인해 현실적인 의식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 막혀 있는 듯 하다.
3회기에서는 상자의 중심에 우물을 놓는다. 우물은 밝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면서 깊은 어둠을 동반하는 끝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어 무의식과 의식의 연결 통로로 여겨진다(Kalff, 2012). 중심을 잡고 무의식적인 작업을 진행해 나가며 치료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축음기가 있으므로 오히려 내면의 감성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4회기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이 강한 내담자가 붉은색의 무언가를 피해서 도망 다니는 악몽을 꾸었다고 한다. 오가다†는 상담이 진행되면서 이에 대한 보상으로 감정에 관련된 것이 무의식 중에 일어나면서 감정적인 측면을 상징하는 붉은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꾼 것 같다고 한다.
5회기에서 등장하는 데미안은 ‘주인공이 청년 시절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자신을 통합해 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내담자가 혼란과 갈등을 겪은 후에 통합을 이뤄야 함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6회기에서는 심리적 퇴행을 보이며 회기 초반에는 부정적인 가족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회기 후반 상자에 꾸민 작품을 설명하면서 자전거를 가족들이 함께 타고 캠핑을 했었던 긍정적인 기억들을 회복해 낸다. 내담자의 감정적인 부분이 건드려지고 있는 듯하다.
7회기 작품에서 사다리를 올라가서 문이 있다는 면에 약간의 위험성이 보인다. 꿈의 세계라고 하며 ‘누군가의 발자국’,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은 공포감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반면, 내담자가 밤에 자신의 방 창문 밖을 쳐다보면 뛰어내리고 싶다고 했던 마음을 상자에 상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위험성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표현을 잘 해내고 있어서 안심할 수 있다.
8회기에서는 중심에 인연이 닿는 한 살아 있을 것이고, 신뢰와 공감을 의미한다며 아주 오래되고 큰 나무를 놓는다. 내담자는 여전히 현실적인 것들을 속물적이라 배척하며 이상적인 꿈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성취”라고 표현한 크레인의 별을 건네주는 것은 완전히 현실의 세계를 거부하고 단절한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해 준 듯하여 안심이 된다.
9회기에서는 무의식과의 접촉과 죽음을 상징하는 우물이 있던 자리에 아기를 놓았다. 중앙의 아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놓은 소품들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설명하며 양면성이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모에 대한 실망과 갈등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며 독립된 주체로서 모를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하는 듯하다.
10회기에서는 심판대로 만들어졌던 작품이 무릉도원이 된다. 가혹한 사춘기의 심판이 끝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9-10회기에 상자에 만다라를 표현하면서 중심을 잡아간다. 내담자가 말했듯이 “미완의 나를 끌어안게”되면서 통합된 자아로 구축되어 감을 느끼게 한다.
11회기에는 촬영스튜디오를 꾸몄다. 내담자가 하고 싶었던 일과 연관된 장면이다. 붉은빛의 꽃과 나무가 인상적이다. 그간 열등했던 감정적인 측면이 살아나고, 속물적이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진로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통합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12회기는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티 테이블이 있는 현실적인 풍경이다. 주변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소통하며 독립적인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친구들의 나와 다른 모습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13회기에서는 현실적인 가족을 표현하며 가족 안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말한다.
이러한 내담자의 변화는 사후 검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사전-사후 검사는 투사 그림검사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그림 1과 같다. 투사 그림검사는 개인의 언어능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비언어성 검사로 진행 과정이나 반응시간이 비교적 짧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김선애, 1993). 또한 객관적 검사를 시행하는 것에 비하여 심리적 부담과 방어가 적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다(정의숙, 2007).
사전 그림검사에서는 가족이 살고 있는 각자 할 일만 하는 조용한 집을 그렸다면 사후그림검사에서는 50년이 지나도 튼튼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자신만의 집을 그렸다. 12회기의 상자와 연결되는 듯한 인상을 주며 독립된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타인과의 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나무 그림은 수간이 비어 있고 덩굴이 감싸고 있어 아직 상처가 남아있고 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담자가 상담을 통하여 자기만의 세계에서 현실 적응의 노력을 보이나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임을 느끼게 한다.
반면, ‘나무들도 많지만, 눈에 띄는 나무고 예뻐서 사람들이 베지 못한다’고 하여 자존감이 회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람 그림은 사진기 앞에서 ‘어디 한번 찍어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자신감 있고 당당한 자아상을 느끼게 한다. 가족화는 사전검사에서는 화목한 모습을 그리며 소외감과 부모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였다면 사후검사에서는 모든 가족이 함께 TV를 보고 있는 현실적인 가족화를 그렸다. 13회기 상자에 표현된 작품과 연결된다. 가족화에서 벽에 시계를 자세하게 묘사하여 1회기부터 등장하던 모래시계와 대비를 이룬다. 모래시계는 현실에서는 조금 떨어진 내담자 마음의 움직임에 맞추어 이미지화한 카이로스 (Kairos)라면 사후 가족화에 그린 시계는 현실적인 크로노스 (Chronos)로 조금 더 현실의 방에 가깝다†. ‘가족’으로서의 소속감을 회복하면서도 가족 구성원들과의 심리적인 분리가 이뤄질 시간이라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이루어진 18회기의 상담에서 13회기의 모래놀이치료 과정은 3단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회기부터 8회기까지 내담자의 내적인 세계로 들어가 언어화하기 어려웠던 우울과 불안, 어두운 그림자들을 표현하며 극복하고 통합해야 하는 과제들을 보였다. 반면, 9회기와 10회기에 만다라를 만들며 자아를 확고히 하고 내적인 균형을 잡아가고, 11회기부터 13회기까지 현실의 세계로 적응을 시도한다.
상담이 종결되고 한 달쯤 뒤 내담자는 지원했던 모든 대학에 합격하였다. 진학할 대학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속물스럽다고만 느꼈던 ‘부’와 심도 있게 상의하여 취업에 용이한 과를 선택했다고 하였다.
대학 진학 후 내담자는 과대표를 맡아 리더쉽을 발휘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인 자세로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또한 선배나 친구들과 원만하게 관계를 맺으며 만족스러운 대학 생활을 하며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논 의
본 사례는 전체 18회기로 진행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사례연구이다. 본 사례연구의 목적은 우울과 불안으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이 모래놀이치료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고 내적인 통합을 이뤄내며 정체성 확립 및 사회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과정을 보고자 하였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내담자는 우울과 불안이 감소되면서 자신의 감정을 가족들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교우관계가 개선되고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리더쉽을 발휘하는 등 자신감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모래놀이치료가 우울과 불안에 효과가 있었다는 선행보고(곽현정, 2014; 서덕원, 2005; 안운경, 2017; 유승은, 박부진, 2010)와 부합되며, 모래놀이치료가 청소년의 자아발달 및 자아정체성 형성에 효과적이라는 선행보고(윤미이, 2017; 전보경, 2006)와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내담자는 첫 작품에서 자신만의 내적인 여정이 시작됨을 알린다. 2회기에는 상담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보여주는데, 지혜를 줄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의 부재, 현실적인 세계로 향하지 못하는 어려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추구와 현실적인 수용 사이의 균형감이 내담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3회기 중심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우물을 놓아 중심을 잡고 무의식의 작업을 진행해 가고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자신의 내면에 우울하고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 보인다. 모래놀이를 통해 내담자의 복잡한 생각들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한다. 4회기에는 감정적인 부분이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5회기 자신 내면의 대립과 갈등을 통합해 가며 성장하는 측면을 보인다. 6회기에서는 7살의 어린 나로 심리적 퇴행을 보인다. Weinrib(2004)은 모래놀이치료는 ‘창조적인 퇴행(creative regression)’을 촉진하여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하였다. 내담자는 모래놀이치료를 통해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었던 가족들과의 긍정적인 경험을 회복해 내며 부에 대한 왜곡된 기억과 감정을 변별해 낼 수 있는 힘을 성장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7회기에 벗어나고 싶은 현실과 두려움, 불안을 상자에 표현하고 8회기는 내담자가 중심을 잡으며 이상과 현실을 통합해 가며 9회기와 10회기에는 만다라를 만들며 심리적 중심을 확고히 해간다. 9회기에는 양면성을 지닌 것들을 통합하며 자존감을 회복해내며 내적인 힘이 생기고 있다. 10회기에는 내담자를 심판하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깨달으며 평온함을 느끼며 내적인 갈등이 해소되어 가면서 통합된 자아를 구축하려 한다. 모래놀이치료 초반의 작품에는 보라색이나 파란색 위주였다면 11회기 등 상담 후반으로 갈수록 붉은색이 나타나며 열등했던 감정이 살아나고 수용하지 못했던 현실의 부분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인다. 12회기에는 자신만의 집을 꾸민다. 현실적이면서도 편안한 공간이다. 관계가 부드러워 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13회기는 함께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는 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자신감이 생기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소속감도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보인다.
이상으로 본 사례연구는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며 자신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워 혼란을 겪는 청소년의 모래놀이 사례연구였다. 본 연구의 내담자는 모래놀이치료가 진행되면서 우울과 불안한 감정에 대한 호소가 줄었으며 일상에 긍정적으로 적응하려는 측면을 보였다. 또한 모래놀이치료가 청소년의 자아 강화 및 자아정체성 확립에 모래놀이치료가 효과적인 방법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